제목광복70주년과 한중파트너십2019-08-08 16:44:48
작성자 Level 10
첨부파일광복70주년과+한중관계.hwp (41.5KB)

이 글은 주간조선 금주 특대호에 실린 글(저자 이영일)입니다.


 

광복70주년과 한중파트너십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1. 항일(抗日)을 위한 한중공투(韓中共鬪)의 파트너십

 

중국군 사열대에 선 박근혜 대통령

 

2015년 9월 3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차려진 열병식은 시진핑(習近平중국 국가주석과 더불어 한국의 박근혜(朴槿惠)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전 세계에 방영했다이 광경은 형식상으로 보면 중국이 개최한 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투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의 한 순서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이 그림이 태어나기까지의 역정(歷程)을 돌이켜 보면 결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이 날의 행사는 그간 냉전에 가려져 밝혀지지 않았던 한중간의 항일을 위한 공동투쟁의 역사적 진실이 7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61년 전인 1954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 기념식 사열대에는 중국의 마오저뚱(毛澤東주석이 북한의 김일성과 나란히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들로부터 사열을 받았다그러나 올해 천안문 사열대에는 태평양전쟁 개시 다음날(1941년 12월 8중국과 더불어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오늘에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대일항쟁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서서 중국인민해방군 부대의 사열을 받았다이 그림은 결코 하나의 의례적인 행사의 형용(形容)이 아니다한중양국의 지난 시대를 규정했던 냉전사(冷戰史)의 종결을 의미한다.

 

한중 공동 항일투쟁사의 재조명

박근혜 대통령은 금년으로 시진핑 주석과 여섯 번째의 만남을 가졌다이 두 지도자들은 만남을 통해서 많은 의제를 다루었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을 두 가지 문제를 회담의 중요한 의제로 설정한 것은 박근혜 대중외교의 큰 공헌이다첫째는 박대통령의 제의로 한중정상대화에서 처음으로 한반도통일문제를 주요의제로 설정한 것이다통일문제를 의제로 한 것은 한중양국 간에 처음 시도된 획기적인 사건이다.

 

둘째는 중국대륙에서 펼쳐진 한국독립운동의 본류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중심으로 재조명한 것이다북한의 김일성이 내세우는 항일혁명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줄기에서 보면 중국동북지방에서 명멸했던 반일투쟁의 한 지류였다독립운동의 본류는 중한문화협회의(中韓文化協會)의 창립을 계기로 한중공조가 강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중심으로 펼쳐진 독립군광복군이 중심이 된 항일독립투쟁이었다그러나 동서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의 중국정부는 냉전이념을 공유하는 김일성 중심의 소규모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중심으로 펼쳐진 본류(本流)독립운동에 묻히기를 원치 않았다때문에 중국 동북지역항일연합군에 포함된 김일성이 부대장이었던 소대(小隊)병력 규모의 투쟁을 평가해줬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그간 중국당국이 외면했던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했다박대통령은 안중근(安重根)의사의 기념처 설치를 시진핑 주석에게 건의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격살사건을 항일의 치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하얼빈 역사(驛舍)에 안중근 기념관을 건립하도록 했다이어 시안(西安)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도 복원되었다.

사실 안중근 의사 기념시설 건립문제는 박근혜 대통령 이전부터 우리 측에서 중국당국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건의했다고 황인성(黃寅性전 국무총리와 고건(高建전 국무총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중국정부에 건의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특정 외국인의 항일운동업적을 중국 땅에 단독으로 부각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 배경에는 북한이 아닌 한국중심의 항일투쟁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으려했기 때문이다심지어 한국의 한 기업인이 자기비용으로 만들어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의 동상까지를 뜯어내어 창고에 처넣기까지 하였다.

시진핑 주석의 취임과 한국독립운동의 재평가

 

다행히도 시진핑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한중정상회담이후 중국대륙에서 펼쳐진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의 업적을 평가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기념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이번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진 상해임시정부청사 재·복원 사업의 경비를 중국정부가 전액 부담해준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맨 처음 세워진 한국임시정부 상해(上海)청사를 복원할 때에는 청사에 살고 있던 중국인 가정의 이전문제와 인근 주택매입비용문제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측과 상해시 당국 간에 오랜 시간의 비용협상이 있었고 광복 50주년기념으로 추진된 중경(重慶)임시정부 청사복원 시에도 임시정부청사에 거주하는 52세대 가구이전비용과 청사 수리 비용문제를 놓고도 질긴 협상을 벌였다결국 우리 측에서 큰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복원사업을 마무리했는데 중국 측이 한국 측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북한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면서부터 중국에서 전개된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을 보는 중국의 태도는 점차 달라져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항일독립운동을 정통독립운동으로 수용하고 한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의해 정당히 계승되고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이러한 상황의 축적이 있었기에 베이징의 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은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행한 세 나라의 지도자즉 시진핑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나란히 사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최근 중국의 항일전쟁승리70주년을 알리는 국내 언론보도를 보면 한국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 개시 다음날 대일선전포고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챙겨서 보도하지 않았다정식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항일전쟁승리 70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러한 논리를 펴는 언론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웠다.

 

2. 중한문화협회의 창립과 한중공투의 시작

 

이제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는 불행하게도 중국대륙에서의 항일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중한문화협회의 존재와 역할을 외면하였다자존심 때문인지 연구부족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중한문화협회를 빼놓으면 중국대륙에서 진행된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실상을 밝힐 수 없다이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가 소홀히 하고 있는 중한문화협회의 전말을 살피기로 한다.

한국임시정부승인 문제

 

한국의 독립운동이 처음부터 중국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한국과 중국 간의 지리적 인접성과 역사적 유대 때문이기도 하다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중국의 신해(辛亥)혁명에 성공한 쑨원(孫文)이 1921년 11월 중화민국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사로서 자기를 찾아온 신규식(申圭植총리대행을 접견한 자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중국의 북벌계획이 완료되면 그때 전력을 다해 한국의 구국운동을 돕겠다는 희망찬 약속을 던진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쑨원 사망 후 1927년 중화민국을 승계한 장제스(蔣介石)는 쑨원이 약속한 한국임시정부승인을 이행하지 않고 유보했다당시 한국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은 이국땅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하는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임시정부에 대한 연합국 정부의 승인을 얻는 것이 독립성공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쑨원의 아들이며 중화민국 입법원장인 쑨커(孫科)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중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공공연히 촉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세력과 중국의 항일 역량을 연결시킬 기관으로서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의 창립에 착수했다원래 중화민국에서는 정식으로 수교한 국가들의 국민들과 중국인민들과의 우호협력을 촉진하는 기관으로 문화협회를 구성공공외교를 추진해왔다중미문화협회나 중소(中蘇)문화협회가 여기에 해당한다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주권도인민도영토도 없는 문자그대로의 임시정부였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간의 수교가 불가능해서 문화협회도 합법적으로 창립할 수 없었다이에 쑨커는 국가대 국가차원이 아닌 당 대 당 차원과 인민 대 인민 차원이라는 중국적 외교방식을 원용해서 앞으로 탄생할 한국독립정부를 상정해 놓고 중국국민당과 공산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정당세력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중한문화협회를 창립하도록 주선중화민국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서 1942년 10월 11일 중국의 임시수도 중경(重慶)에서 중한문화협회가 창립되었다창립식에는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참여하여 격려사를 했고 중한문화협회의 조직은 중국국민당의 고위간부들과 중국공산당한국임시정부의 고위층들을 포함한 한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들로 구성되었다이 때는 중국의 중경이 한중양측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피난처였기 때문에 중한문화협회와 구별되는 한중문화협회를 따로 구성하지 않고 한국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인 조소앙(趙素昻)을 한국 측 창구로 하여 협력을 전개해왔다.

 

중국의 한국임시정부 지원

 

중국정부는 중한문화협회의 창립을 계기로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한문화협회 지원형식으로 실시했다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한문화협회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활동으로 한국임시정부승인을 촉구하는 문서청원을 주도하고 한국임시정부승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강연회학술회의 등을 줄기차게 개최하였으며 3.1절 기념 독립운동행사를 통해 한국독립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알리는 사업도 꾸준히 이어갔다특히 한국임시정부승인문제를 관철하기 위해 쑨커는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대표와 제휴하여 내적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을 임시정부 깃발 아래로 뭉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결국 김구(金九)가 이끄는 임시정부세력과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군계열의 조선혁명당 세력들이 중국정부의 임시정부승인을 전제로 대동 단합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중국정부는 전후처리문제의 어려움을 내세워 한 치의 영토도 없는 임시정부승인을 유보하자는 영국 처칠 수상의 주장에 휘말려 한국임시정부승인을 끝까지 유보했다.

중한문화협회는 비록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정부의 승인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국독립운동의 정통성이 한국임시정부로 수렴되고 대일무력투쟁의 총본산으로 광복군사령부가 설치되는 등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역사를 펼쳐지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한국의 독립운동사연구가들은 중한문화협회가 중국대륙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투쟁에 미친 커다란 기여를 전혀 연구하지도평가하지도 않는 실정이다.

 

3. 중화인민공화국 탄생과 한중문화협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부터 쑨커가 이끌던 중한문화협회는 대만으로 이주했다중한문화협회의 한국 측 파트너였던 조소앙 선생은 1945년 귀국 후 한중문화협회를 광복된 한국 땅에 발족시키려고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로 본인이 납북되면서 한중문화협회의 창립을 보지 못했다.


홈페이지 용량관계로 원고를 끝까지 싣지 못합니다.

전체 원고는 상단에 파일을 첨부하오니 참고바랍니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